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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노무현김대중

노대통령 영전에 바친 3천배 살아계실 때 해드리고 싶었는데

by 구르다 2009. 5. 28.
내일이면

△ 봉하마을 2009.5.25.

노무현 前대통령의 장례식이 경복궁에서 거행된다. 노前대통령 추모 분향소가 전국에 수백개가 세워졌고,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는 사람이 수백만을 헤아린다. 먼 길 마다않고 봉하마을을 찾아 노前대통령을 추모하는 조문객만도 하루 수십만에 이른다.

하루 일을 끝내고 밤길을 몇 시간 달려 영전에 국화 한 송이 올리고 또 새벽길을 달려 일터로 돌아가는 무박 2일의 조문이 생소하지 않다.

조문 자격논쟁이 벌어졌고 그것이 일단락 되고나니 일부 권력층과 관료들의 눈꼴사나운 분향태도에 대해서 시민들은 항의하고 이것이 실시간으로 블로거들에 의해 알려진다. 정부에서는 추모열기의 과열에 겁먹어 소요우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추모객들은 차분하게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분명 국민과 현 정부는 180도 다른 사고를 하고 있다. 그 결과일까 한나라당과 MB의 지지율과 국정신뢰도가 추모객이 늘어날 수록 곤두박질 치고있다. 그럼에도 정치 지능이 떨어지는 이들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추도사까지 난감해 할 정도로 민심을 거스르는 역주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미래가 있을까? ㅉㅉ

우리 역사에서 정치인의 죽음에 대해서 살아있는 권력이 불편한 마음을 비추는데도 마음을 다하여 국민적인 애도를 표한 적이 있었던가?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 같고 앞으로 있다면 대한민국은 상당히 성숙한 민주국가가 된 이후 일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연구해 봐도 좋을 것이다.


무박 2일의 조문을 하는 조문객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창원 사는 특권으로 지난 23일에 이어 25일에도 일을 끝내고 봉하마을 방문하였다. 또 두바퀴 이동수단이라 걸어서 조문하는 분들에게도 죄송하다. 23일은 멍멍한 나를 달래기위한 방문이었고 25일은 조문이었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것이 아닌데 길어진다. 나머지는 아래 글로 대신하고,,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람들도 많고, 추모방식도 다양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조문해야 하는 사연도 다양하다.
25일 밤 9시 쯤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취재도 해야하는 데 줄을 서서 기다려 조문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노사모 기념관에 마련 된 임시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임시분향소 가는 길에 큰 방석을 깔아 놓고 절을 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봉하마을 현장 소식을 전하는 블로거로서 당연히 호김심이 발동했다. 23일 KBS 중계차 포스팅으로 많은 방문을 받은 뒤라 야, 이거 기사되겠다라는 속물적(?)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현장스케치는 했지만 누군가를 인터뷰 취재해서 올린 적은 없었다.

△ 봉하마을 2009.5.25.21:54


그러다 보니 뭔가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잠시 어떻게 취재하지 라는 막연함이 몰려왔다.

△ 봉하마을 2009.5.25 21:57


일단 사진을 찍으며 주위 분위기를 살폈다. 그 사이 기자증을 붙인 기자도 취재를 하고, 카메라 후레쉬도 터진다.
내가 취재 받던 기억을 떠올리며 옆에 계신 분에게 "뭐하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우리 아들인데 노무현대통령께 3천배를 올리는 것이다"라고 한다.

여전히 기사를 쓰겠다는 의도 때문인지 누군가를 취재한다는 것이 어색하다...
일단 3천배를 한다는 것 까지만 알고 임시분향소로 가서 헌화를 하고 주변 풍경을 찍고 다시 왔다.





편하게 취재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그 자리에 머물면서 어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들 이름이 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사이 기자들이 또 왔다 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머니도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어느 정도는 가지고 계셨다.
블로거인 나 말고도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까 약간은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봉하마을에 대한 언론과 방송의 왜곡이 걱정되었는지 어느 언론인지도 물어보시고, 말도 아껴서 한다.
어제 좋은 인연이었다고 문자도 받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 봉하마을 2009.5.25 22:37


나는 조심스럽게 취재하는 반면 언론사 프로기자들은 참 편리하게 취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하게는 3천배를 올리고 있는 중에 말을 걸다 포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언론사가 아주 기본적인 사항, 이름, 나이, 왜하는지, 사진 몇 장에 더하여 한두가지...그게 모두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스치듯 취재하고 간다..

그것을 보며 드는 생각이 저렇게해서 제대로 된 기사가 나올까? 사건 취재도 아니고 저런 방식의 취재가 맞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취재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머물면서 지켜보고 대화하고 거들어 주면서 취재를 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취재를 한다는 생각은 잊어버렸다. 노 전대통령께 3천배를 올리는 그를 응원하고 노전대통령의 명복을 함게 빌게 되었다.


△ 봉하마을 2009.5.25. 22:37


시간이 지날 수록 어머니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3000배를 올리는 당사자는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학생신도 정재호씨(불명 : 보현)로 올해 나이 서른 여덟의 총각이다. (기자들은 37세로 취재를 한다)
어머니 말로는 노전대통령이 황망하게 서거하시자 애통하고 비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3천 배를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저녁 7시30분 부터 시작을 했는데 끝나는 시각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시면서, 불교에서는 3천 배가 최고의 선물이라고 거듭 강조하신다.

시간이 흐를수록 재호씨의 3천 배를 격려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옆에서 108배로서 노전대통령의 축원을 함께 비는 분도 계셨다.
 
7시 30분 부터 시작된 3천배를 1000배까지는 수월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재호씨에게 가해지는 고통도 커져간다.

3천배를 올리기 시작한지 3시간이 지났다. 이 때가 1600배가 되어갔다. 20배를 올리고 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적힌 책장을 넘기고 그렇게 150장을 넘기면 3000천 배가 되는 것이었다.
밤이 될 수록 날이 쌀쌀해 져 갔지만 재호씨의 옷은 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 봉하마을 2009.5.25. 22:40


1600배를 올리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다리를 주무르며 아들이 무사히 3000 배를 올릴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한다.
1시간 30분 가까이 지켜서서 어머니와 이야기 나누며 격려한 때문일까..많이 친근해 졌다.
사진 찍는 것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호씨에게 말을 걸었다.

무식한 질문이지만 첫 질문이 힘들지 않느냐(당근 힘들거다)..웃음으로 답한다.

어떻게 3천 배를 올리게 되었는가?
=>"생전 힘들어 하실 때 3천 배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준비가 부족해서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는 미루면 되지 않을 것 같아 부족하지만 준비하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떤 면이 3천 배를 하게 만들었나?
=>(약간은 흥분한 상태에서 답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분이잖아요.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이 퇴임후에 고향에 내려와 우리 같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며 살았느냐?"고 나에게 반문한다.

노무현 전 대통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셨지만, 그렇게 까지 된 것에는 책임질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노 전 대통령이 유서에서 '원망하지 마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느냐?
=>"나도 사람입니다. 왜 원망스럽지 않겠어요"

조문을 왔다 주민들이 막아서 조문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고 했는데 그 분들이 조문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가하느냐?
=> "조문을 막아서는 안된다. 그대신 조문 오는 사람들이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와야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다시 3천 배가 이어진다.

△ 봉하마을 2009.5.25. 23:03


재호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어머니도 "노 전대통령이 생전에 힘들어 하실 때 3천 배를 올리려고 했던 것'은 몰랐던 사실이라며 아들 재호씨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자랑했다.
올 해 5월에 가족이 봉하마을 다녀갔는데 아쉽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재호씨는 직접 출력한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과 유서를 앞에 두고 3천배를 올리고 있다.

△ 봉하마을 2009.5.25. 23:15


3천 배를 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쌀쌀한 밤시간임에도 재호씨의 얼굴과 머리에 땀이 흐르는 것을 보며 그 어려움을 짐작할 뿐이다.
3천 배를 시작한지 4시간이 되어 간다.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점점 길어 진다.

△ 봉하마을 2009.5.25. 23:22


언론에서는 꾸준하게 관심을 가진다. 아마 먼저 취재한 기자들이 소스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 봉하마을 2009.5.25. 23:23


어떤 분이 초를 가져왔다.
또 어떤 분은 만원짜리 지폐를 두고 가기도 했다.

△ 봉하마을 2009.5.25.23:27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를 태운 키작은 초와 새로 속살을 드러낸 초가 나란히 한다.
어머니는 초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이 노전대통령도 그렇게 살다 가신 것 아니냐고 하신다.

지금 어느 분은 누구를 위해 단 한번도 살아보지 않아서 일까..그 누구에게도 친근한 촛불을 다섯살 짜리가 들어도 경기(驚氣 )를 일으키니 말이다.

△ 봉하마을 2009.5.25. 23:34


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고나서야, 그분에게 빚졌다고 고백하고있으며, 있을 때 몰랐는데 떠나고 나서야 노전대통령이 소중한 존재임을 실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 똑똑한척 하지만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허탈하기도 한다. 그것이 비단 노무현 전대통령을 잃고 후회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이 다 그런 것 같다. 그러기에 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

△ 봉하마을 2009.5.25. 23:35


최철국 민주당 국회의원(김해)도 이 광경을 보고 어머니 손을 잡고 격려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봉하마을 2009.5.25. 23:48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자주 쉬게 된다. 급격하게 체력도 떨어지고..
힘들어 하는 기색도 역력하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헌화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은 사람들이 지나도 삼배를 하기도 한다



12시가 다되어 가는 시간이다. 2천 배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몇 개의 촛불이었는데 이제 촛불이 줄지어 섰다.

△ 봉하마을 2009.5.25. 23:52


아들이 힘들어 하자 어머니가 옆에 섰다.
모자의 노전대통령을 축원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 봉하마을 2009.5.25.23:58


3천 배는 자아를 버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는 수도이고, 3천 배를 올리고 나면 그 상대도 바뀐다고 한다.
이 모자의 3천 배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헤코지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자정이 되었다. 이제 2천 배를 하였다. 

△ 봉하마을 2009.5.26. 00:00


앞으로 남은 천 배는 정말 자신과의 약속을 위한 고행이 될 것이다.
3천 배를 시작하고 4시간 30분이 흘렀다.

△ 봉하마을 2009.5.26.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