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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로/길걷기

걷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사라져 가는 흙담

by 구르다 2010. 6. 20.
최근 본 흙담 사진을 올려놓고 글을 쓰려는데 엉뚱한 생각이 든다.
만약 우리 조상이 콘크리트로 집을 짓고, 시멘트 블록과 벽돌로 담을 쌓았다면 지금 우리 땅은 어떤 모습일까?

그래서 온전한 자연을 물려준 조상이 고맙다.

우리 후세대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100년, 500년, 1,000년 후에 우리 땅에는 사람이 살 만할까?

특색 없는 콘크리트아파트공화국, 국토의 젖줄인 생명의 강에도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토건공화국 우리 후세대는 현시대는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좋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미래는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 세대의 편리와 안락만을 추구한 지독히 이기적인 시대로 기록하고, 평가할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조상이 걸었던 길을 바퀴 달린 차가 아닌 두 다리, 두 발로 걷는다.
역(驛)과 역, 읍성과 역, 역과 나루, 읍성과 나루를 잇는 길을 걷는 모임인 동행에 벌써 일곱 번 참석하였다. 한 번 걸을 때 삼십 리 이상은 족히 걸으니 벌써 200리 이상을 걸었다.

두 발로 걸어보면 우리가 사는 도시가 얼마나 사람 살기 안 좋은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안다. 사람을 위한 도시가 아닌 차를 위한 도시, 그런데 우리는 그것에 너무 길들었고 감각은 무뎌졌다.
도시를 벗어나 읍내 장터, 논길, 시골 골목길을 걷다 보면 그렇게 상실된 감각이 조금씩 회복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008년 교육을 받기 위해 제주 다음 본사인 글로벌미디어센터를 방문하였다. 인상 깊었던 것이 다음 본사 건물을 땅의 원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지었다는 사실이다.
2008/09/13 - web2.0 노출은 무죄-다음 제주 글로벌미디어센터

함안에서 그런 담장을 만났다. 이수정에서 칠원읍성으로 가는 길에 만난 동산정의 담장이 그랬다. 흙담을 오랜만에 보아 좋기도 했지만, 담 밑에 바위를 그대로 두고 담의 곡선을 만들어 낸 것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함안읍성에서 창인역을 거쳐 칠원읍성 오가는 옛길



동산정 아래 마을 빈집의 흙담이다. 골목에는 들풀이 꽃을 피웠다.
이 집에 살던 사람은 어쩌면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멋을 아는 사람이 이 집에 살러 오지 않으면 이 흙담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길을 걷다 흙담을 만나는 행운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 생각하면 안타깝다.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칠원읍내에 도착하였다.
읍 외곽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읍 장터 주변으로는 그래도 골목도 남아 있고, 흙담은 아니지만 정감어린 담장을 볼 수 있다.


흙 대신 시멘트를 사용하였지만, 이 담장의 주 재료는 칠원천에서 가져온 돌이다.
퇴적암이 발달한 지역이라 물결화석이 담에 사용되었다.
수십만 사람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도심 한가운데 이런 담장과 골목이 있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작품이지 않을까?



칠원초등학교 담장으로 남아 있는 칠원읍성이다. 성종 23년(1492년)에 축조되었으니 500년이 훌쩍 넘었다.
읍성조차 50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허물어졌는데, 담장은 더 빨리 사라지지 않을까?



시골 골목을 걷다 보면 투박한 흙벽돌로 벽을 친 헛간 같은 것을 만나기도 한다. 시멘트 벽돌이나 블록으로 바꾸지 않고 흙벽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보면 집주인은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것만 같다.



또, 운 좋게 문화재로 지정되어 앞으로도 보존 가능성이 많은 흙담을 만나기도 한다. 함안 무기리 주씨 고가의 흙담이 그런 경우다.
더 잘 보존하려고 흙담을 허물고 시멘트 담에 무늬만 돌 문양으로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건 나의 기우일까?


함안 무기리 주씨 고가는 300년 전 상주 주씨들이 이주하여 생겨난 집성촌에 있는 종가로,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인 하환정, 풍욕루 등 별당과 연못이 딸린 큰 규모의 주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