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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로/길걷기

1500년 시간여행 창원 천주산 두리길 걷기

by 구르다 2010. 10. 27.
웰빙 바람과 함께 걷는 것이 유행이다. 그리고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지니 지자체도 앞다투어 길을 내고 있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지 판단이 되질 않는다.
건강을 위해 길을 걷는 것 좋은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이 시간을 따로 내어 걷기를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비극이다.
건강이 아닌 다른 이유로 길을 걷는다 하면 다르지만 말이다.

지난 토요일 천주산 기슭을 걷는 두리길 모임에 참여하였다.
길을 걷다 만난 토기 조각 하나로 15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랐다. 선인들이 걸었던 길에는 이렇게 고스란히 역사가 어려 있고 귀를 열고 길을 걸으면 그 역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망호등 길에서 주운 5세기 토기 조각



내가 속한 단체에서는 창원시 평생학습 우수프로그램 지원사업으로 두리길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 삶터 주변에서 새 길이 아니라 옛사람이 걸었던 길을 찾아 이어 이야기가 있는 길을 새로 개척하는 프로그램이다.
길이 좋아 길에 푹 빠진 최헌섭 선생이 두리길의 개척자이고 안내자이다.
최헌섭 선생은 이렇게 두리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길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는 것이라 했다지? 길은 내기도 하고, 열기도 하고, 만들기도 해야 온전한 길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길 내기, 길 걷기 바람에 휩싸여 있다. 좋은 바람이다. 온 누리를 구석구석 누비며 살뜰한 마음으로 살피니 그렇고, 그것이 이웃에 대한 관심이 되고 스스로에겐 가슴과 머리를 살찌우면서 몸도 굳세게 만들어 주니 더욱 그렇다.


▲ 최헌섭 선생이 개척한 천주산 두리길



이런 바람으로 내 삶터 가까운 곳에 있는 검뫼(검산;檢山, 첨산;檐山, 담산;擔山)를 중심으로 남산(南山), 천주산(天柱山), 망호등(望呼嶝) 기슭의 자드락길을 이어 두리길을 열고자 한다. 두리길이란 올레길, 둘레길 등 다른 이름의 길이 이미 열려 있어 함지땅 창원의 북쪽 산자락의 자드락길을 걸어 원점회귀(原點回歸)하는 순환로(徇環路)를 그리 이름 지어 본 것이다. 우리 삶터의 테두리를 에우고 있는 길이란 뜻이며 아울러 가족끼리, 연인끼리, 벗끼리, 하나가 아닌 둘이서 나아가 더 많은 이들이 걷기를 바라기에 두리길이라 해 보았다.


10월 15일 연구소 이사회를 끝내고, 경남정보사회연구소 생일잔치를 하고 최헌섭 선생의 두리길에 대한 이론 교육이 있었다.
이론 교육에 참여한 연구소 이사와 실무자들은 참 착한 학생의 모습을 보였다.
경남발전연구원 이은진 원장과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차정인 교수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길에 대해서는 최헌섭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학생이라 그 어느 분보다 열성을 보였다.
이렇게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배우려고 하는 연구소가 참 좋다.


▲ 경남정보사회연구소 두리길 이론 교육 2010.10.15.봉곡마을도서관(쳥생교육센터)




10월 23일 두리길의 출발지인 천주운동장에 이날 두리길 참가자들이 모였다.
두리길의 출발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있는 남산에서 시작해야 하지만 앞서 3번을 진행하면서 30여 분 걷는 도심을 통과하는 길이 밋밋하고 참여자들이 힘들어하여 출발지를 천주산 자락 양리숲 뒤에 있는 천주운동장에서 출발하였다.
완만한 길을 걷는 것이지만 평소 차로 이동하는 것에 익숙한 몸이라 출발 전 준비운동을 꼼꼼히 하였다.
오늘 두리길 걷기 참여자는 13명이다.




운동장을 벗어나 조금만 걸으면 천주산 자드락길을 만난다.
자드락길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닌 무게에 겨워 내려앉은 길인데, 지리학에서는 인간이나 짐승이 가한 중력에 의해 가라앉았다고 하여 sunken road라 한다. 아직 마땅한 우리말이 없어 최헌섭 선생이 붙인 길이름이 자드락길이다.


▲ 천주산 자드락길을 오르다.



천주산 자드락길을 조금 걷다 보면 너덜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너덜길 들머리에는 아기를 묻은 돌무덤인 독무덤을 만나게 된다.
최헌섭 선생의 말을 빌리면 "우리 조상들은 정상적이지 못한 죽음은 원혼(冤魂)이 된다고 믿었고 그래서 원귀가 떠돌며 해코지를 할까 하는 염려에 돌로 무덤을 만들어 악령을 누른 것이다."라고 한다.
천주산 너덜길 들머리 독무덤이 보존이 잘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연을 모르고 보면 아기를 묻은 독무덤도 그냥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날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귀를 열고 길을 걸으면 돌멩이 하나에 깃든 사연을 듣게 된다.
이것이 두리길 걷기의 재미이기도 하다.


▲ 천주산 자드락길에서 만난 독무덤(애기무덤)을 최헌섭 선생이 설명하고 있다. 2010.10.23




자드락길을 조금 더 걸으면 창원이 한눈에 보이는 확 트인 곳을 만난다.
창원의 진산인 검산이 보이는 곳이다. 검산(檢山)은 옛 창원도호부 시절 창원의 진산으로 첨산(檐山), 담산(擔山)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잊혀져 창원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산(北山)이라 부른다.
검산은 우리말 ‘감뫼’를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어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는데, 그렇다면 검산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를 올렸던 터일 것이라고 했다.


▲ 천주산 자드락길에서 검산을 설명하는 최헌섭 선생



발아래로는 창원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 천주산 자드락길에서 본 창원시



가을 햇살을 받은 산자락에는 쑥부쟁이가 곱게 피었고, 등애 한 마리가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쑥부쟁이와 정겨운 눈 맞춤을 하고 몇 발짝을 걸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하얀 꽃잎을 자랑하는 해맑은 구절초를 만났다.

많은 사람이 가을의 대표 꽃인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분하지 않고 쑥부쟁이도 구절초라 부른다.
이렇게 둘을 놓고 보면 확연히 다른 데 말이다.





조금 더 걸어 천주암 아래에 닿으면 바위에 글을 새긴 마애비를 만났다.
이 마애비는 약 40여 년 전에 새긴 것으로 가운데에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새기고 그 양쪽에 천주암신령봉(天柱庵辛靈峰) 정미사월일(丁未四月日)이라 새겨놓았다.
남무아미타불이라 쓰고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는데, ‘바란다’는 뜻의 범어(梵語)를 중국에서 한자로 남무라 옮겼기 때문이란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부처이므로 나중에 좋은 곳에 가시고 싶은 분은 열심히 외라고 최0헌섭 선생이 일러준다.


▲ 천주산 마애비




천주암은 1920년대 후반에 토굴 형식의 법당으로 출발하여 1937년에 사암(私庵) 등록하였고, 탑의 전형을 벗어난 파격적인 대웅전 앞 오층석탑은 1949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천주암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천주암 대웅전에는 근처에서 캐낸 것이라 전하는 마애불이 봉안되어 있다. 마애불은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좌상으로 신광과 두광을 일체식으로 새긴 것으로 전체적으로 왜소한 느낌이 들고, 양식적으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헤아려진다고 최헌섭 선생이 설명한다.


▲ 천주암 대웅전 항마촉지인 여래좌상 마애불, 고려시대



천주암 샘에서 목을 축이고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만난 키 큰 코스모스다.
가을이라 빛깔이 참으로 곱다.


천주암 아래의 식당에 들려 도토리묵에 약초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큰길에 내려섰다.
굴현 고개로 향하기 전에 장붕익 선정비를 먼저 보았다.
장붕익은 영조 임금 때 창원도호부사를 지낸 인물로 조선시대 조직폭력배들이 가장 두려워한 위인이라 한다.

굴현고개를 넘지 않고 오른쪽 산자락으로 오르면 검산으로 오르게 된다.
최헌섭 선생이 쓴 두리길 자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굴현고개에서 동쪽으로 낙남정간(洛南正幹)의 마루금을 밟으며 창원의 진산인 검뫼에 오른다. 바로 이 구간에서 우리는 낙남정간을 따라 걷게 되는데, 이 산줄기는 낙동강 남쪽을 아우르는 분수령의 이름으로 지리산 영신봉(삼신봉)에서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이어 낙동강 하구에 이른다. 예서 낙남정간 이야기를 잠깐 나누면서 지날까 한다. 낙남정간은 우리 산경(山經)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남북 양쪽을 잇는 위격이 인정되어 북쪽의 장백정간(長白正幹)과 함께 대간(大幹)의 다음 격인 정간(正幹)이라 한다. 그러니 몇몇 사람들이 편의적으로 그 조카뻘인 정맥(正脈)과 동격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검산에서 참가자 단체사진




검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창원도호부 성안으로 들었다.
이원수 선생이 유년을 보낸 곳과 성안의 북동샘을 보고 시장 국밥집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일제는 철로를 놓는다는 명분으로 창원읍성을 허물었고 객사 자리에는 시장을 세웠다. 세심하게 살펴보면 일제가 우리의 문화와 얼을 알게 모르게 천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점심을 먹고 창원향교에서 두리길 걷기는 파하고, 남은 사람들은 의기투합하여 망호등까지 걸었다.
망호등은 최헌섭 선생이 우연히 발견한 산성이라고 한다.
우리 생활주변의 유적이지만 돌보는 이 없으니 이곳이 산성이라는 푯말 하나 서 있지 않다.
최헌섭 선생은 많은 돈을 들여 산성을 복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곽주변의 나무와 잡풀을 정리하고 안내 표지판을 만들면 그것으로서 훌륭한 역사교육장이 될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망호등을 걸으며 선명한 나뭇잎 문양을 간직한 토기 파편을 주웠다. 5세기의 대표적 토기문양이라 한다.
무려 1500년 전으로 이 길의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눈과 귀를 열지 않으면 그냥 건강을 위해 무심히 걷고말 길이지만, 생활 주변의 가까운 두리길에서도 눈과 귀를 열어 놓으니 15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나들 수가 있었다.

길은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의 무수한 발걸음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제는 그 길을 무시로 걷지 않으니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가져본다.
올레길, 둘레길 열풍으로 지자체가 앞장서 사람이 다니기 좋은 편한 길을 만든다고 자연을 훼손하며 없는 길을 만드는 것보다,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찾아내 잊고 그 길에 얽힌 이야기를 엮어낸다면 그 이상 좋은 길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