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24일에는 경남도청 후문 앞에 있는 대안공간 마루에는 사람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발해1300호 학술뗏목탐사대에 활동에 참가하여 돌아오지 않은 이용호대원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올해가 12번째 추모식이었습니다.
△ 이용호 대원의 모교인 창원대 민주동문회 창우회 회장이 술을 올리고 있습니다.
1997년 12월 31일 발해1300호는 블라디보스톡 끄라스키노항에서 출항하였습니다.
그리고 20여 일 동해의 거친 파도를 이기며 발해항로를 복원하고자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1998년 1월 24일 일본 도고섬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 일본 도고섬 해안에서 발견된 발해1300호 뗏목을 유가족들이 확인하고 있다. 2008.1.27
발해 1300호 뗏목 탐사대에는 4명의 대원이 함께 하였습니다.
창원에서 1월24일 추모제는 이용호 대원을 기리는 추모제입니다. 이용호대원이 졸업한 창원대학교의 친구와 선후배들이 마련하는 추모제입니다.
저도 탐사대 준비과정에 몇 번 기웃거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속한 단체도 협력단체로 참여 하였습니다.
그들이 남긴 항해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월12일(13일째)
09:35 연구소 깃발이 물에 빠진 모양이다. 모두 기분좋게 다 달아 주고 싶다. 대장노릇 힘들다. 그러나 잘해 내었다. 성공 항해가 마무리되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대장 장철수
1960.2.9 경남 통영 생
1981.3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입학
1987.3 한국외국어대 독도문제연구회 발족주도
1987.7 울릉도-독도뗏목탐사 참가(주최:한국탐험협회)
1988.7 독도사진전 (장소:울릉농협) 주도
1995 21세기 바다연구소 소장
1996.3 한국해양대 대학원 해사법학과 석사과정 입학
1996.4 '독도와 거북선'전시회(주최:경남신문) 주도
1997.12 발해 1300호 탐사대장
1998.1 탐사도중 일본근해에서 사망
1998.2 경남통영에서 통영시민장으로 영결식
시아 극동대학 명예 해양학 박사학위 수여
선장 이덕영
1949.2.25경북 울릉도에서 태어남
1967. 대구 경북공고 졸업
1983~6.울릉산악회 11대 회장
1987. 7 울릉도-독도뗏목탐사 참가(주최:한국탐험협회)
1988. 푸른독도가꾸기모임 초대회장
1993. 4H연맹 울릉도 회장
1996. 전국자연보호 봉사단 중앙회 울릉지회장
1996. 푸른국토가꾸기 운동본부 본부장
1997. 서울시 27개 구청에 구절초 3만본 기증
1997.12 발해1300호 선장
1998. 1 발해항로 뗏목탐사 도중 사망
촬영 이용호
1963.12.7경남 마산에서 태어남
1982. 경남 진해상고 졸업
1984.3 창원대학교 미술학과 입학
1989. 경남 미술대전 공예부분 최우수상 수상
1990. 경남 미술대전 공예부분 우수상
가야 미술대전 시각공예부분 특선
전국 대학생 미술대전 은상
환경보전협회 포스터 공모전 은상
1991. 창원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한국 현대미술 대상전 입선
1993. 봉림회전(창원,마산)
1996. 15회 창원시민의 날 기념행사 총괄기획(디자인팀장)
1997. 바다의 날 기념 독도해상 선상세미너 참가
1997.12 발해1300호 촬영담당
1998.1 발해항로 뗏목탐사 도중 사망
통신 임현규
1971. 전남 구례군 토지면 출생
1990.2 순천 효천고등학교 졸업
1990.3 한국해양대학교 해운경영학과 입학
1997. 한국해양대학교 아마추어무선국 활동
1997.12 발해1300호 통신담당
1998.1.24 발해항로 뗏목탐사 도중 사망
1998.2.24 한국해양대학교 졸업(졸업장은 아버지 임광진씨가 대신 받음)
△ 1997년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발해1300호 출항식
장철수 대장은 배 중에 가장 안전한 것이 뗏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뗏목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발해 1300호는 길이 15m, 너비 5m, 전체 넓이 20평 규모의 결코 작지 않은 뗏목이었습니다.
결국에는 태풍으로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해의 거친 파도와 싸우며 20여 일을 항해하였습니다.
그것도 추운 겨울에 말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장철수 대장의 뗏목 예찬은 입증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1월7일(8일째)
08:20 선실의 오른쪽이 내려앉았는 것 같다. 과연 뗏목에서 안정의 한계수치는 어디까지일까? 아직 갈 길이 험하다. 간밤 폭풍으로 키(방향타)가 유실되었다. 감기가 들어 콧물과 기침이 나오고 극도로 체력이 저하되었다.
1월 5일의 뗏목 사진입니다.
탐사대의 1월 5일 항해일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월5일(6일째)
어제의 거센 바람은 배를 거의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이빨을 닦았다. 잇몸을 감싸고 도는 단내를 그냥 두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15:25 밤 사이 힘들었던 항해였다. 일본쪽으로 많이 이동했다.
21:00 나의 탐험은 지금부터다. 넓은 고구려 땅을 당나라와 신라에 빼앗긴 대조영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들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을까요?
그 답은 그들의 항해일지에서 어렴풋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1월11일(12일째)
02:00 북풍이 불고 파고가 높다. 탐사에는 반칙이 있어서는 안된다.
△ 부러진 손 가락에 깁스를 하고도 환하게 웃고 있는 고 이용호 대원
그들은 살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은 정당한 탐사가 아니라 생각하고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무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30대의 젊은이들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요?
그들은 발해1300호 뗏목에 함께 했지만, 그들을 진정 하나로 묶어준 것은 우리의 외로운 섬 독도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해양주권에 대한 걱정과 혹시 자신들의 표류가 나라에 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1월22일(23일째)
08:00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 실루엣이 보인다. 시집간 딸이 온 기분이다.
08:50 사과에 비상식을 먹었다. 파도는 너울거리고 바람도 잔다. 또 걱정이다.
10:00 교신. 가는 방향으로 진행하라. 냉정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23일까지 휴가.
15:00 초조한 시간들.
18:00 파도와 바람이 치고 있다. 일본에 가서 수속을 하느니 독도로 항해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오키섬 깊숙이 들어왔다.
22:20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만 바람도, 해류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으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아픈 왼손으로 악다귀를 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모든 것은 동물적 생존의식, 약자에게 가해지는 처참함이 내 앞에 놓여있다.
23:20 현재 돛을 내리고 해류를 타고 있다. 도고란 섬을 이야기하며 도고헤이이치로(근대 일본 해군의 국민적 영웅, 충무공 전법을 연구해 1905년 러일전쟁시 대마도 해전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킴)를 이야기했다. 이순신에게 빌었다. 지금은 저들에게 갈 수 없노라고. 현재 나침판은 북서를 가리키고 있다. 이상하다.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추모하며 자기식대로 합니다.
자신이 간직한 추억을 꺼집어 내 보는 시간이 죽은자를 추억하는 방식입니다.
이날 자리에 모인 사람들 역시 앞선 이에 대한 추억을 제각각 간직하고 모였습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추억하는 제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실의 우리는 자꾸 늙어 가는데, 사진 속 그들은 늙지도 않고 그때 그 모습으로 웃고만 있습니다.
우리가 추억하고 간직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모습이 아니고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이어야 하는데,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그것은 자꾸 잊히고 있습니다.
97년12월31일(1일째)
- 출항사
- 블라디보스톡 끄라스키노항 출항
98년1월1일(2일째)
13:20 교신 계속 시도하나 잘되지 않음. 예약 주파수인데 누가 방해 전파 쏘고 있음.
15:30 판자 떨어져 상판에 뒹군다.
20:00 발전기 고장. 선장님이 고치다.
20:35 야간항해. 첫날 항해에 대원들은 만족.
1월2일(3일째)
09:00 밖에는 약간의 눈. 바람과 조류가 전혀 없다. 여전히 상갑판에는 얼음이 붙어 있다.
12:00 교신을 위해 발전기 가동. 교신이 되기를 기다림. (한국과 교신되는 사람에게 보드카 1병을 주기로 하는 등 탐사대원들은 교신 성공을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매달렸다.)
12:50 화장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일 문제는 물을 어떻게 피하느냐다. (항해기간 내내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 중의 하나가 생리 처리 문제.)
15:00 북한방송이 들리고 있다.
17:25 첫 교신이 되었다.
일기에는 경기도 안산의 백현호씨 등 6명의 아마추어 무선사(HAM)들과 교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어 오후 7시25분에 시작해 창원의 송차식씨(경일고 교사), 부산의 해양대 HAM 동아리와도 교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교신은 다시 끊기고 만다. 이를 근거로 일부 방송에서는 뗏목 탐사대가 실종됐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1월3일(4일째)
08:30 정말 밤에는 약간 무서웠다. 선실의 삐걱거림은 적당히 사람을 공포로 몰아 가는 듯했다.
1월4일(5일째)
04:10 전원이 기상을 했다. 돛줄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충분한 수면이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배는 잘 가고 있다.
07:00 돛을 모두 내렸다. 물에 밀려가는 속도를 측정한다. 바다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08:30 겨우 백두산 위치인 42도를 넘었다. 파도가 우리를 시험이라도 할 듯 좌우 밑으로 계속 때린다. 시베리아의 북풍은 계속 거세다. 그러나 우리는 꼭 해낼 것이다.
16:20 파도는 우리가 수리를 해놓고 나면 그것을 실험이라도 하듯 큰 힘으로 두들겨 재낀다.
1월5일(6일째)
어제의 거센 바람은 배를 거의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이빨을 닦았다. 잇몸을 감싸고 도는 단내를 그냥 두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15:25 밤 사이 힘들었던 항해였다. 일본쪽으로 많이 이동했다.
21:00 나의 탐험은 지금부터다. 넓은 고구려 땅을 당나라와 신라에 빼앗긴 대조영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1월6일(7일째)
03:00 동해의 너울을 고독과 적막으로 건넌다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럴수록 파도는 거세진다. 바람도 더욱 거세진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면 고통도 있어야 되겠지만 인내 또한 더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의미 있는 작업에는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뗏목 탐험은 우리의 동해가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12:00 오른손에 비닐을 감고 돛을 올렸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배를 믿는다. 탐험은 역시 좋은 것이다.
14:00 파도가 상당히 거칠어지고 있다. 조금의 교만도 험한 상황에 돌입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해야 되겠지만 교만은 절대 금물이다. 외무부와 해경의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또다른 만족이지만 부담으로 남는다.
17:00 오전 교신 때 아시아나 항공 HAM 동아리에서 중계를 해주어 많은 분들과 교신을 할 수 있었다. 오전 5시 교신은 끊긴 지 81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20:00 돛을 내렸다. 엄청난 속도의 바람이 불었다. 뗏목이 바다를 날아간다는 표현이 좋으리라 싶다. 그리고 파도는 뗏목을 선실을 차고 난리 요동을 친다. 가장 어려운 항해다. 벽으로 물이 스미는 것을 보았다. 한기가 느껴져 엔진을 켰다.
1월7일(8일째)
08:20 선실의 오른쪽이 내려앉았는 것 같다. 과연 뗏목에서 안정의 한계수치는 어디까지일까? 아직 갈 길이 험하다. 간밤 폭풍으로 키(방향타)가 유실되었다. 감기가 들어 콧물과 기침이 나오고 극도로 체력이 저하되었다.
12:00 용골이 튀어나와 용호 형님이 X자로 고정. 안테나 상태가 좋지 않아 다시 고치고 있음.
17:40 달걀을 바닷물로 끓이고 있다. 용호가 상당히 허기진 모양이다. 감기약을 먹었다. 기다리던 북동풍이다. 약간 미약하지만.
20:45 라디오에서 옹헤야를 하니 배가 춤을 추고 있다.
21:30 오늘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 바람도 가끔은 해류까지 우리를 도와준다. 뗏목은 정말 훌륭한 배다. 이 기능성과 복원력만 갖출 수 있다면 바다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하늘 저편에서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1월8일(9일째)
09:40 아침식사, 용호. 빵, 소시지, 달걀 무쳐 볶았다. 후식:사과. 오늘의 할 일 안테나 수리.
19:00 연변 방송국 뉴스가 선명하게 나오고 있다. 정말 우리나라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탐사팀은 제주 성산포로 가려던 처음 계획을 이날 부산으로 변경했다. 중간 기착지인 독도 울릉도는 예정대로 들르기로 했다.
1월9일(10일째)
04:30 계속 북동풍. 그러나 배는 순항한다. 발해 1300호는 버릴 것은 동해 깊은 곳에 던지고 실을 것은 우리의 뗏목에 실어 돌아가겠습니다.
10:00 대원들은 분주히 돛을 꿰매고 주변을 손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어젯밤은 12시까지 노래를 하고 보드카를 마시며 여흥을 즐겼다.
10:30 거의 바다에 떠 있다. 제문을 짓기로 했다.
16:30 동해에서 용왕제를 올렸다.
1월10일(11일째)
10:40 물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멀리 도망갔으나 아쉬웠다. 아침이라도 함께 먹고 싶었는데….
1월11일(12일째)
02:00 북풍이 불고 파고가 높다. 탐사에는 반칙이 있어서는 안된다.
11:35 38선을 곧 넘을 것 같다. 오늘은 파도가 거칠었다. 38선. 지금쯤 우리 수역으로 들어온 것 같다. 우리 땅을 건너는 것에 마음이 설레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참 많이 울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16:00 항상 대장은 악역이어야 하는가. 어렵게 여기까지 와서 의견이 엇갈린다. 그냥 울릉도를 경유하면 좋겠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1월12일(13일째)
09:35 연구소 깃발이 물에 빠진 모양이다. 모두 기분좋게 다 달아 주고 싶다. 대장노릇 힘들다. 그러나 잘해 내었다. 성공 항해가 마무리되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17:15 밖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다.
21:00 이제 탐사가 중반에 들어왔다. 편법과 연출하는 행위. 진지하지 못함. 불성실. 그러한 것은 이미 인정할 수 없는 탐험이다.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1월13일(14일째)
09:00 오늘이 몇십년만에 중강진에서 영하 44도가 되었던 날이라고 라디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비가 오고 있다. 배가 계속 북쪽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대원들이 지쳐 있다. 나의 지도력도 이제는 힘을 잃어 가는 것 같다.
14:40 중요한 고비가 될 것 같다. 바람은 북서풍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다. 울릉도로 갈지 변수가 예상된다.
22:00 동쪽 해류가 강하다. 어려울 때를 생각하자.
1월14일(15일째)
03:45 동쪽으로 많이 흘러갔다. 초조하게 한시간씩 G. P. S.를 보고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내가 왜 탐험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심신이 피곤하다. 그러나 어제 예기치 않은 해류에 밀려 자칫, 울릉도와 독도마저 보지 못하는 그래서 곧장 일본으로 빠지는 사태가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더했다. 그래서, 행여 경비정에나 몰려가는 보기싫은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여….
08:00 나침판을 무시하고, 바람 방향만 파악하고 무조건 서쪽으로 항해를 했던 것이 좋았다. 졸리면서도 졸음항해를 방지하려 옷을 가볍게 입었더니, 추위가 몸을 감싸고 돌았다. 발해는 대양항해로 신라와의 교역이 가능했고 고대인들의 독도 발견도 충분히 가능했다.
12:00 폭풍주의보. 3∼4m. 파고가 상당하다. 우리 항해에는 더없이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육지로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북동풍이다.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시속 5km. 다행히 바람이 우리가 원하는 쪽이 되어 성공항해가 기대된다.
19:15 폭풍을 뚫고 뗏목이 가고 있다. 돛을 내렸다. 울릉도 내릴 계획을 취소하고 북동풍으로 육지쪽을 향한다. 거쳐온 시간들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아련해진다.
뗏목이 울릉도 근처에서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쯤. 이곳의 한 해군기지 레이더에 몇분동안 뗏목이 포착됐다. 이에 앞서 12시쯤 탐사팀은 울릉도 지원팀과 교신을 통해 저동항에 입항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교신하는 그 시간에 동해 전해상에 또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경경비정도 출항을 하지 못할 만큼 기상상태가 나빴다. 뗏목도 끝내 접안에 실패했다.
1월15일(16일째)
02:00 아직도 울릉도의 집 불빛과 등대가 보인다. 서서 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흔들린다.
07:10 나는 이번 항해를 하며 너무 많은 비나리를 하고 있다. 명예도 욕심도 다 버리자. 이 폭풍 속에 살아낼 수 있음에 감사드리자.
11:00 도대체 이 나라에는 바다에 대한 교류도 없었단 말이냐. 그리고 기껏해야 연안을 오가는 짧은 거리만 있고 모두 중국과 일본의 독무대였고 동해가 일본해, 황해가 중국해, 그리고 기껏 남쪽에 있다 하여 남해뿐인가 말이다.
19:00 돛줄을 잡으면서 옷이 흠뻑 젖어 감기가 들어 약을 먹었다. 출입국 관리를 해결해야 할 것 같다.
24:00 손등에 약간의 뼈가 올라왔다. 그리고 아프다. 진통제를 먹었다. 1시간 30분씩 교대근무를 하다.
1월16일(17일째)
08:00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을 제사의 형태로 바랄 수밖에 없었다.
11:40 동해 지명문제가 UN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될 것 같다.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지명이란 중요하다. 어려울수록 전진하는 것이 뗏목 정신.
14:00 현규가 선미에서 현대깃발을 정리하고 선장님은 선수, 용호는 돛을 잡고 있다. 방황의 30대 마지막 여행. 이제 무얼할까. 깡그리 날려 보내자.
이날 폭풍주의보와 경보가 해제됐다. 뗏목은 육지쪽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경에 문의한 결과 그대로 순항하면 17∼18일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맞춰 부산의 지원팀과 해양대에서는 인양선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뗏목은 무풍지대에서 맴돌았다. 18일 낮까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실제 항해도상에 8자처럼 그려진 항로궤적이 바로 그것이다.
1월17일(18일째)
08:30 해류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어렵게 왔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고 바람도 불지 않아 안타깝다.
13:10 위대한 탐험가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16:30 빵이 상했다. 소시지도 상했다. 여전히 무풍지대다. 모두 쉬고 있다. 울릉도에서 기상이 나빠 4:00이 돼서야 배가 떠났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한시간 후 쯤에는 그 여파가 뗏목으로 오겠지.
17:00 선플라워호와 비상주파수로 연결하였다. 이소희씨와 연락하여 8:00(오후) 해경과 지원하기로 했다.
22:15 지원함대가 오기로 했으나 오지 않는다.
17일 오후 3시. 폭풍주의보가 해제되면서 13일 입항 이후 운행이 중단됐던 포항행 선플라워호가 울릉도 도동항을 출발했다. 지원팀 이소희씨와 이재희씨도 탐사팀과의 조우를 포기하고 이 배를 타고 포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포항으로 가던 뱃길에서 지원팀을 찾는 선내방송이 들렸다. 뗏목이 먼저 선플라워호를 발견하고 교신을 했던 것이다. 레이더를 살펴본 결과 뗏목은 선플라워호와 12마일 떨어진 곳에서 점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원팀은 ‘어떻게든 밤 8∼9시쯤 만나러 갈 것’을 탐사대와 약속했다.
포항에 도착하는 길로 지원팀은 밤 8시30분쯤 해경을 찾아갔다. 애원과 설득 끝에 밤 9시쯤 겨우 경비정 한척을 얻어 탈 수 있었다. 뗏목을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날이 바뀌어 18일 새벽 1시15분쯤 작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항해를 계속해 새벽 2시쯤에야 꼭대기에 경광등이 달린 뗏목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경북 후포 앞바다 41마일 지점이었다.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호루라기를 불고 함장까지 합세해 소리치는 고함을 듣고서야 장철수 대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음은 그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1월18일(19일째)
"지원팀과 접촉."
2:30 잠결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선체의 불이 들어왔다. 해경배가 도착하였다.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탐사대 옆으로 바짝 붙여 물품을 전달하였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부랴부랴 옷을 챙기고, 비옷을 챙긴다고 늦었다. 해경에서도 소리를 치며 누구라도 빨리 나오라 했지만 손을 다친 내가 나가서 무얼 할 것인가. 양쪽의 눈치보기에 바쁘고 창으로 랜턴만 비추고 있다. 15분간 급하게 물자를 이동했다. 뗏목과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부표를 받쳐주는 해경대원들이 고마웠다. 항해 중 첫 사람들과의 직접 조우였다. 꼼꼼하게 챙긴 보급품과 편지(이소희). 고마움에 어쩔 줄 몰랐다. 떠나가는 배를 통하여 무전으로 함장님과 교신하고 고마움을 전했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07:00 탐사에 대한 나의 마음도 정리를 해야 될 시간이 된 것 같다.
09:00 뉴스, 설악산 등반의 사고소식이 들렸다. 우리도 그런 위기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의 사고 방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찔한 순간들. 뗏목의 안전도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19:00 2시간씩 야간근무. 이상하게 바람은 분명 북서남동 방향인데 G. P. S, 는 동쪽으로 치닫는다.
해경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고 부산으로 항진을 시도했던 18일 밤 8시 다시 폭풍주위보가 발효됐다가 만 하루 뒤에야 해제됐다. 그런데 밑에서 밀고 올라오는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뗏목은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5일부터 동경 130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뗏목은 19일 계속 동진해 마침내 동경 131도선을 넘게 된다. 지원팀에서는 일본 영해 침범을 우려해 동경 129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했다. 탐사대도 노력하겠다는 교신을 보내 왔다. 그러나 탐사대의 의지와 노력과는 달리 뗏목은 오키제도 방향으로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1월19일(20일째)
"폭풍우 때문에 일본쪽으로 밀리는 뗏목"
09:30 폭풍우가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계속 동쪽으로 밀린다. 이 방향이면 오키섬으로 가지 않겠나 싶다. 일본으로 간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1. 우리 어선을 나포하지 말라. 2. 바다는 넓다. 바다를 통하여 더불어 사는 민족이 되길 바란다. 영원한 제국이란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15:25 라디오에서 덕영 고향을 묻는 퀴즈가 나왔다. 다소 위안이 된다. 조금 전 이심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18:00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우리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있다. 라디오 방송도 점점 멀어지고 일본어 방송만 들려올 뿐이다.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강한 자신감 하나로 버텨왔는데 이제 또다시 용기를 내자. 할 수 있다. 하늘은 우리 편이다. 나는 기필코 해낼 것이다.
뗏목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 독도 주변을 지나게 된다. 탐사대는 1월20일부터 부산 입항을 포기하고 독도 접안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1일 아침 울릉도 ·독도 해상에 다시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이마저 무산됐다.
1월20(21일째)
"이대로 일본쪽으로 표류해야 하는가?"
09:00 바다가 다시 거칠어지고 있다. 대원들이 약간 피로해 보인다. 지원팀의 어려움에 아무런 이야기도 못함이 안타깝다.
12:00 날씨는 여전히 북서풍으로 괴롭히고 있다. 용호와 오키섬으로 가는 의논이 있었다. 이 상태에서 어디로 가든 자존심과 자신감이다. 1차 항해의 종료를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한국으로 들어가는 시기도 지금은 좋지 않다.
18:40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오키쪽으로 가니 위도는 그대로인데 동쪽으로 간다. 일본으로 가는 마음은 썩 좋지는 않다.
20:25 사건이 발생. 발전기에 물이 들어가 타는 냄새. 버너로 말려서 원인 제거. 베니어판으로 물막이를 하다.
21:30 일단 돛을 내리고 표류를 하기로 했다. 이 상태에서 오키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제일 가까운 독도를 생각했다.
1월21일(22일째)
"바람과 해류로 독도접안 포기. 오키섬의 불빛이 보인다"
08:45 독도로 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다.나의 판단과 결정은 왜 이리 힘들까.
09:25 나라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이란 나라? 이 동해 한가운데서 생각한다. 독도가 옆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 우리를 체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저들은 우리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을까.
09:45 좌표는 점점 밑으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불리한 상황이다. 어쩌면 예견된 것이겠지만 조치를 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대원들은 아무 말없다. 하늘은 맑은데 바람과 파도는 왜 이러는가? 이런 경우 부적같은 것이 없을까?
15:20 그동안 흘러온 해도를 보았다. 참으로 동해를 헤집고 다녔다. 이 광풍과 파도에 견딜 수 있다는 뗏목에 감사할 뿐이다. 독도. 저 조그만 섬이 위안을 갖게 한다. 오키로 가는 최후의 저지선. 북서풍을 차단하는 해류의 흐름이 있다.
16:10 추위로 바다의 즐거움은 덜하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하자. 그래야만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를 마음껏 안고 싶던 내게 부상은 30세의 마지막을 정리시키고 있다. 빨리 탈출하고 싶다. 갑자기 눈보라가 치고, 주위는 이내 깜깜하다. 파도가 또다시 발광을 한다. 방황했던 30대. 벌거벗고, 갖은 땟자국을 이 바다에 던지고 싶다. 사랑했던 30대. 잘 가시오.
16:22 나침판이 동북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해류 편승 조짐.
21:15 해류에 밀려 남진하는 방향이 동진하고 있다. 앞으로 야기될 많은 문제들이 불안하게 다가오고 있다. 간혹 오키섬에서 보이는 섬광이 번뜩인다.
독도접안을 시도했던 탐사대는 결국 이를 포기하고 최종 목적지를 오키섬에서 가까운 본토 ‘쓰루가’ (敦賀)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오키제도 도고섬을 1차 접안지로 정했다.
1월22일(23일째)
"이순신 장군에게 빌었다. 지금은 저들에게 갈 수 없노라고"
08:00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 실루엣이 보인다. 시집간 딸이 온 기분이다.
08:50 사과에 비상식을 먹었다. 파도는 너울거리고 바람도 잔다. 또 걱정이다.
10:00 교신. 가는 방향으로 진행하라. 냉정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23일까지 휴가.
15:00 초조한 시간들.
18:00 파도와 바람이 치고 있다. 일본에 가서 수속을 하느니 독도로 항해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오키섬 깊숙이 들어왔다.
22:20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만 바람도, 해류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으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아픈 왼손으로 악다귀를 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모든 것은 동물적 생존의식, 약자에게 가해지는 처참함이 내 앞에 놓여있다.
23:20 현재 돛을 내리고 해류를 타고 있다. 도고란 섬을 이야기하며 도고헤이이치로(근대 일본 해군의 국민적 영웅, 충무공 전법을 연구해 1905년 러일전쟁시 대마도 해전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킴)를 이야기했다. 이순신에게 빌었다. 지금은 저들에게 갈 수 없노라고. 현재 나침판은 북서를 가리키고 있다. 이상하다.
당초 대원들은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일본측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들은 독도는 우리 땅임을 알리기 위해 각종 역사적 사료를 내세우며 일본에 대항해 온 독도의 파수꾼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일본 상륙을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본측의 조사에 대비한듯 항해일기에 낙서하듯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학술탐사로 밀려왔다. 한국으로 다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1월23일(24일째)
"순시선이 왔다. 걱정할 필요없다."
07:00 장비 고장과 소모가 많다. 눈 앞에는 등대가 보이고 항로는 오키섬으로 들어서고 있다.
09:30 버너 고장으로 가까스로 밥을 하는데 가스가 3통밖에 없다.
10:00 뗏목이 종횡무진이다.
11:05 다시 공격할 시점을 잡고 있다. 북서풍이 미약해질 시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12:00 아침은 비상식 귤. 어디선가 일본측 교신이 비상주파수로 나오고 있다. 일본에서 우리의 뱃길을 따라오고 있다고 함.
13:35 모든 것이 아쉬움 투성이다. 속이 타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지금은 나의 신체와 정신이 위축되어 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16:00 바다가 거칠어진다. 배가 섬으로 밀려가고 있다. 우선 섬으로 피신을 했으면 한다. 교신이 빨리 되길 바란다. 우리 탐험대가 맞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협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도고에 들어감. 도고에 잠시 머문다. 일본영사관에 협조요청. 휘발유 급유. 8시 교신.
(장철수 대장이 오후4시 무렵에 작성한 일기)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16:16 도와달라. 도고섬 8km 전방이다. 이대로 가면 섬에 충돌할 것 같다.
19:05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급박해지고 있다.
20:08 도고섬과의 거리가 2km 남았다.
20:25 40분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가. MAY DAY를 외친 후….
20:50 순시선과 연락이 닿았다.
20:56 (탐사대:)순시선이 왔다. 걱정할 필요없다.(지원팀:)순시선이 온 것이 사실이냐. (탐사대:)예. 맞습니다. 이제 준비해야 하니 교신을 중단해야 하겠습니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한국 해경으로부터 뗏목 구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받은 것은 오후 6시30분. 해상 보안청은 즉시 뗏목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 앞 5마일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높은 파도로 사고를 염려한 해상보안청은 일본 도고섬의 ‘사이고(西鄕)’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해상청 브리핑에 의하면 밤 8시30분쯤 순시선은 통신교신이 가능할 만큼 뗏목 가까이 접근했다. 순시선의 레이더에 잡힌 뗏목은 점점 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시선 사령탑은 대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닻을 내려라”고 요구했다. 당시 뗏목과 섬과의 거리는 1백50여m에 불과했다.
구조에 나선 일본순시선이 뗏목의 불빛을 처음 발견한 시각은 밤 9시쯤. 무선지원팀과 마지막 교신이 오간지 10여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순시선에서는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파도 속에 묻혀 요동치는 뗏목의 위치는 좀체 확인이 되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에서는 해상 자위대에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헬기는 24일 새벽 1시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1월24일(25일째)
"1,2차 구조헬기 연료부족으로 회항, 뗏목에 묶여있는 시신"
출동한 헬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현장을 수색했지만 강풍·눈보라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첫번째, 두번째 헬기는 연료 부족으로 회항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시선 레이더에는 뗏목이 포착됐고 쌍안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이미 뗏목은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헬기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아침 6시쯤 도고섬 서북쪽 후쿠우라(福浦)항 남쪽반도 해변에 좌초해 있는 뗏목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1백m 떨어진 바다 위에는 2명의 대원이 엎드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또 1명은 뗏목에 몸을 묶은 채 파도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간 다이버는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2명 가운데 이용호 대원을 먼저 구조했지만 숨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육지로부터 불과 수십m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바로 임현규 대원이었다. 뗏목에 묶여 있던 사람은 이덕영 선장.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뗏목에는 돛대에 묶인 그의 발목만 남아 있었다. 발해 항로 재현의 꿈은 이렇게 파도 속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