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람

22년 지나도 임수경은 통일의 꽃

by 구르다 2011. 1. 4.

근래 강풀의 '당신의 모든 순간' 만화를 짠한 마음으로 보았다.
"무슨 소중한 기억이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까요?"
단편의 만화가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무슨 소중한 기억이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까?

철없이 살다 80년대 대학을 진학하며 세상에 대해 눈뜨게 되고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 남북대학생회담 참가를 위해 연세대로 모이던 대학생들을 경찰이 폭력연행하고 있다. 1988.8.15(한겨레) 사진:범민련 20년사 사진편


범민련 20년사 사진첩을 펼쳐보며 20여 년 전 나의 흔적을 발견했다. 한겨레 신문사에서 제공한 1988년 8월 15일 사진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8월 14일의 사진으로 보인다. 8월 15일은 통선대는 인간사슬로 서로 꽁꽁 묶었었다.

88년 제1기 통일선봉대를 하였다. 8월 14일 교문 사수 투쟁을 하다 지랄탄을 쏘며 교문 진입을 하는 백골단에 붙잡혀 오뉴월 개 맞듯이 얻어터졌다. 사진의 머리채를 잡힌 학생이 그때의 나를 닮았다.
닭장차에 처박혔을 때 안경은 어디론가 달아나 있었고, 마스크에는 진득한 액체 범벅이었다.
서부서에 도착하고서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욱신거렸다.
서부서가 너무 붐벼 영등포 경찰서로 옮겨졌고, 하룻밤을 자고 훈방되었다.
우리 일행이 훈방될 즈음 옆에서는 조서 꾸미는 소리가 높았다. 8월 15일 인간사슬을 한 통일선봉대가 잡혀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88년 대학 2학년의 기억이다.

▲ 평양축전 성사 '백만학도 결의대회' 참가를 위해 경찰의 봉쇄를 뚫고 한양대 입성. '환상의 진입' 1989.6.28. 사진 : 범민련 20년사 사진편


89년에는 단과대 학생회장을 했다. 3월부터 기소중지로 수배자가 되어 학교생활을 했었다.
그해 봄 학자투를 하며 방황을 많이 했었고,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6월 방학이 시작되었다. 집에는 혼자 여행을 가겠다며 약간의 용돈을 얻어 배낭을 쌌다.

그런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이 평양청년학생축천 결의대회가 열리는 한양대다.
한양대 캠프에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밤을 보냈다.
학교 동료들 보다 며칠 앞서 올라왔기에 끈 떨어진 내가 미운 오리새끼로 여겨졌다.
빈둥빈둥 있을 수 없어 교문사수 투쟁에도 끼였지만 소속이 불분명한 나는 이방인이었다.

▲ 임수경 대표의 기자회견과 판문점을 통한 귀환(1989) 사진 : 범민련 20년사 사진편


며칠 뒤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도착하고서야 이방인 신세에서 벗어났다.
어둠 속 낯선 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나의 방황은 정리되었다.
89년 한양대 평축 투쟁에서 전철역을 사수하는 책임을 맡았었다.

경찰의 한양대 침탈이 있었던 날 침탈 소식을 늦게 접하였고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경찰에 붙잡혔다.
수배 중이라 구속을 생각했는데 그 당시 잡힌 학생들이 너무나 많아 제대로 신원조회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즉심 재판을 받고 풀려났었다.

89년에 대한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통일의 꽃 임수경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기억은 시간이 흐른다고 결코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 2011년 새해 첫날 국민의명령 봉하마을 민란에서 통일의꽃 임수경과 함께


2011년 1월 1일 새해 첫 민란이 봉하마을에서 있었다.
한명숙 총리를 비롯하여 유명 인사를 보았고 악수하였다. 그리고 통일의 꽃 임수경도 만났다.
다른 사람과는 사진을 함께 찍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통일의 꽃 임수경과는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는 첫 대면이다. 트위터에서 맞팔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나를 모른다.
그럼에도,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영원히 지우지 못할 89년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기억을 많이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삶을 규정지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많은 청년 시절의 기억을 우선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