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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국민의명령

새해 첫날 국민의명령 봉하마을 민란

by 구르다 2011. 1. 3.

▲ 국민의 명령 2011년 첫 민란. 2011.1.1 봉하마을






2011년 새해 첫날 뜨는 해를 봉화산 사자 바위에서 맞이하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전국에서 봉하마을을 찾은 해맞이객이다.




서두른 덕분에 맨 앞줄에서 해맞이하였다.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뭔가 소원을 빌어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자유인을 꿈꾸는 나의 내면일 것이다.
뭔가를 빌고 소원하는 것마저 집착이지 않을까?

봉화산 사자 바위 일출을 선택한 것은 국민의 명령 2011년 첫 민란이 봉하마을에서 있기 때문이다.
봉하마을에 도착하여 해맞이를 위해 봉화산으로 향하는 어둠 속에서 봉하민란 준비에 바쁜 준비팀을 보았다.


▲ 봉화산 사자 바위 일출 2011.1.1



해맞이하고 내려와 작은비석을 방문하였다. 이른 시각임에도 참배객들이 많다.
작은비석 입구 수반의 물은 얼음이 되어 바닥의 자갈과 뒤엉켜 뒹굴고 있었다.
봉하마을에도 새해 첫날 햇살이 번지고 식당 앞에는 이미 민란을 위한 준비가 끝나있다.
마음이 괜히 급해진다. 식당에서 떡국으로 배를 채우고 서명 테이블 앞에 섰다.

이때가 9시 30분쯤이다. 해맞이를 위해 일찍 온 것이 다행이다 싶다.
손에 국화꽃을 든 사람들이 호객(?) 행위를 하지 않아도 회원가입을 한다.
날이 차가워 볼펜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잉크가 굳어 잘 나오지 않았다.


▲ 국민의 명령 2011년 첫 민란의 구르다. 2011.1.1 봉하마을



그렇게 10시가 넘어가고 해운대에서 해맞이 민란을 벌인 부산과 대구 회원들이 도착했다.
쉬지도 않고 바로 봉하민란에 합류했다.
활기가 넘친다.




부산의 민주할매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할매는 불완전한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이 땅의 민주주의와 고락을 함께한 분이다.
반공이 국시였던 나라에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그러기에 지난 민주정부 10년은 그런 손가락질 받지 않아 살맛 나지 않았을까?
그런 한이 있기에 그 누구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통한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 강한것 아닐까?


▲ 부산의 민주할매. 2011.1.1 봉하마을



1시30분 참여정부 인사들의 참배가 끝나고 2시가 넘어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가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미 봉하민란은 열을 받아 무르익었다. 첫 민란에서 회원가입한 분들에게 선물로 준비한 수첩 300개는 이미 오전에 바닥났다.
 

▲ 연설하는 문성근 대표. 2011.1.1 봉하마을



이미 민란 회원으로 가입한 이인영,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이 마이크를 잡고 이명박 정권 심판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연대를 호소하였다.
김두관 지사를 비롯해 참여정부 인사들이 2011년 봉하마을 첫 민란에서 국민의 명령 회원이 되었다.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가 민란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 국민의 명령 회원들과 사진 찍는 문성근 대표. 2011.1.1 봉하마을



국민의 명령은 12월 31일까지 목표한 5만 회원을 달성하였다.
아직 기간을 딱히 정해 놓지는 않았지만 10만 회원이 다음 목표가 될 것이다.
2011년 1월1일 봉하마을 첫 민란에서 1,347명이 국민의 명령에 동참하였다.
새해 첫날 백만 민란의 들불은 확실하게 붙은 것이다.

'민란'이라는 표현이 과격하다고 하는 분도 있고 이름에 반한 분도 만났다.
문성근 대표는 '민란'이 국민의 명령이 추구하는 국민 참여 운동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인 것 같아 선택했다고 한다.

민란이 다소 과격한 표현이라는 분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동학 농민군은 죽창 들고 민란을 했지만, 국민의 명령 백만 민란은 스마트폰 들고 한다.


* 새해 첫날 만 4년을 사용한 카메라가 고장 났습니다. 그래서 민란 현장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습니다.
포스팅에 사용한 사진은
동백낭구님이 찍은 것입니다. 고맙습니다.